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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물상의 어제 그리고 오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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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6-07-18 10:27 조회2,403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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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물상의 어제 그리고 오늘 

?src=%22http%3A%2F%2Fdimg.donga.com%2Fwp지난달 27일 경기 고양시의 한 고물상에서 업체 관계자가 1t 화물차량에 각종 재활용품을 싣고 있다. 최근 들어 고물상이 유가 하락에 따른 제품가격 하락과 경기침체로 운영상 어려움을 겪는 가운데 정부는 영세고물상에 대한 규제를 풀겠다는 방침을 밝혔다. 고양=임현석 기자 lhs@donga.com
‘세계적 진품 곤여만국전도라 이름한 300여 년 전의 세계지도 한 장이 평양에서 발견됐다.’ 

1931년 3월 22일 동아일보에 실린 한 기사는 이런 문장으로 시작된다.

기사는 이탈리아 선교사 마테오 리치가 1602년 만들어 명나라 황제인 만력제에게 헌상한 지도를 평양에서 찾았다는 내용이다. 발견된 곤여만국전도가 원본인지 복사본인지 알기 어려워 경성제대에 감정을 보낸다는 내용도 덧붙였다. 발견자는 명문학교 평양공립고등보통학교(평양고보)의 한 학생. 발견 장소는 고물상이었다. 상대적으로 푼돈인 8원을 주고 매입했다.  

고물상에서 골동품 세계지도를 취급했다는 점이 의아하게 느껴지지만 그때는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당시 고물상은 한복과 양복, 권총, 단검, 불상, 책, 세계지도, 제사용 그릇, 자전거 등 온갖 물건을 불법과 합법을 가리지 않고 취급했다. 폐품을 포함해 모든 중고품을 수집했다. 해당 지도는 필사본이나 역시 귀한 보물로 밝혀졌다. 당시엔 고물상에서 보물도 찾아낼 수 있었다. 

이처럼 고물상은 시대별로 역할과 모습이 달랐다. 1910∼1930년대에는 폐품을 수집해 재활용 업체에 넘기기도 했지만 이처럼 중고품을 판매했다는 기록도 숱하게 확인된다. 고물상이 자원 재활용 기지와 중고장터 역할을 함께 했던 셈이다. 고물상은 학생이 들르는 중고서점이면서 저렴하게 옷을 살 수 있는 의류매장이었고 낯선 기계장치와 부품들을 확인할 수 있는 근대의 명소이기도 했다. 고물상은 일본 총독부가 1912년부터 영업허가 등록 대상으로 알리면서 도입됐고 이후 백화점과 마찬가지로 빠르게 도시의 풍경을 바꿔갔다.

 

엿장수와 함께 규제 대상으로  

고물상을 통해 근대문물이 사람들의 일상에 침투했다.

고물상이 있어 당대 민중도 생소한 기계장치나 사치품에 접근할 수 있었다. 1923년 6월 1일. 경기 고양군(당시)에서 위조지폐 제조 기계를 만든 일당 5명이 경찰에 체포됐다. 이들이 만든 기계는 실제론 작동되지 않는 먹통이었다. 이들은 위조지폐 기계라며 사람들에게 엉터리 장치를 보여주고 투자금만 받아 챙기려던 사기꾼이었다. 기계에 미리 지폐 한 장을 넣어 두었다가 꺼내는 방식으로 사람들을 속이려 했다.

기계식 장치를 쉽게 접하기 어려웠던 시기에 어떻게 각종 기계부품을 손에 넣었을까. 아니나 다를까. 이들은 고물상을 돌아다니며 여러 가지 부품을 모아다가 만든 것이라고 진술했다.  

이처럼 고물상은 상대적으로 고철 등 폐자원을 모으는 장소라기보다 ‘중고품 수집판매소’ 역할이 강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말인 1930년대 후반으로 치달으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1937년 중일전쟁이 시작되고 전쟁물자가 부족해지면서 자원 수집 역할이 중요해진 게 결정적인 계기였다. 물자 관리에 힘쓰던 총독부가 고물상에 폐자원 수거 협조를 당부하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허가를 받지 않고 주거지도 불투명한 폐자원 수집자들은 철퇴를 맞았다. 다름 아닌 엿장수였다.  

1939년 10월 14일 동아일보에 실렸던 ‘엿행상(엿장수)의 폐품매매금지’라는 기사를 보자. 마산경찰서가 당시 마산지역에서 엿장수들이 폐품을 모으는 것을 막는다는 내용이다. 이들의 폐품 수집을 막은 이유는 표면적으로는 두 가지였다. 엿도 식품인 만큼 위생 문제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 또 이들이 폐품을 모으는 과정에서 절도를 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이를 막겠다는 것이었다.  

속내는 이보다 복잡했다. 물자를 수월하게 회수하기 위해서는 허가받은 고물상을 통하는 편이 더 효율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막상 고물상에게 폐품 수거 업무를 맡겨도 생각했던 것처럼 폐품 수집이 원활하진 않았다. 가격이 오를 것 같은 재활용품은 숨겨 놓거나 폐품 절도를 저지르는 등 총독부 정책을 잘 따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에 총독부는 1942년을 넘어서면서 자유로운 고물상 영업을 제한하고 직접 관리하는 ‘폐품회수조합’ 등을 다수 설립했다.  

이 과정에서 김두한 등 종로 뒷골목 주먹들이 고철 등 폐품 회수에 나서면서 사람들을 공포에 떨게 했다. 가정에서 쓰지 않는 물건을 폐품 처리한다는 명분으로 총독부가 특별회수 조치를 발표할 때마다 뒷골목 주먹들이 직접 가정집에서 폐품을 공출해 갔다. 고물상은 위축되고, 대신 주먹들이 폐품 수집을 주도하는 시기였다.

동의대 사학과 김인호 교수는 “일제강점기 말 폐품 수집에 큰 이권이 걸려 있어 많은 깡패와 건달이 구리 등 고철을 수거하기 위해 가정집을 찾았다”고 설명했다.


넝마주이에서 고물상으로  

광복 이후 고물상은 장물을 취급하고 도시 미관을 해친다는 인식이 강해서 단속의 대상이었다. 고물상보다는 고아 등으로 이뤄진 이른바 ‘넝마주이’들이 마을을 이루면서 살아가는 경우가 많아졌다. 이들은 폐품을 팔아 연명하는 사람들이었다. 넝마주이촌에서는 이른바 ‘왕초’가 불우한 청소년들을 거느렸다.  

왕초는 이들을 폐품 수집업에 종사토록 강제하고 제지공장 등에 폐품을 팔아 남긴 돈의 30%가량을 상납받았다. 이를 위해 불우한 청소년들을 상대로 협박하거나 경우에 따라 폭력을 행사하기도 했다. 폐품 수집은 부랑자나 하는 일이라는 인식이 생긴 것도 이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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넝마주이는 1970년대 도시 개발과 맞물리면서 거점을 잃고 사라지기 시작했다. 넝마주이촌으로 대표되는 빈민공간이 해체됐기 때문이다. 여기에 군사정부가 1962년부터 넝마주이를 부랑자로 보고 감시 대상으로 삼으면서 관할 경찰서의 수용소에서 머물게 한 것도 왕초 문화가 사라지는 계기가 됐다. 당시 넝마주이로 시작해 현재 서울 강북구의 한 고물상을 운영하는 김모 씨(72)는 “왕초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각자 노력한 만큼 돈을 벌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면서 힘든 인생에도 희망이 보이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넝마주이와 엿장수 등은 유통과 산업 규모가 커지기 시작한 1970년대부터 고물상을 직접 운영하는 방향으로 틀기 시작했다. 폐품회수조합 등에 밀려났던 고물행상이 당당한 사업가가 될 기반을 이때 마련했다. 1993년 들어서는 고물상이 장물거래를 할 가능성이 별로 높지 않다는 이유로 그동안 유지하던 허가제를 폐지하면서 규제도 크게 완화됐다.

21세기 최첨단 시대를 사는 오늘날의 고물상은 어떤 모습일까. 지난달 25일 주거단지에서 700m나 떨어진 곳에 위치한 경기 구리시의 한 고물상. 이곳 주인인 고철영 씨(61)는 “최근 자원 재활용이 중요하다는 인식이 커지면서 고물상이 혐오시설이란 편견은 많이 사라졌다”고 말했다. 한때 장물거래나 절도 등이 이뤄진다고 생각해 고물상을 불편하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달라졌다는 것. 자원 재활용의 거점으로 사람들의 인식이 점차 바뀌는 것을 느낀다고 했다.  


오늘날 편견 사라져도 운영에 어려움 겪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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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주위의 인식이 좋아졌다고 해도 여전히 고물상 운영은 녹록지 않다. 2013년부터 폐기물관리법이 개정되면서 일정 규모 이상(특별시·광역시 1000m²)인 고물상은 의무적으로 폐기물 처리 신고를 하고 주거지나 상업지에서 고물상을 할 수 없도록 규제를 강화한 것을 두고서도 업주들은 불편함을 느낀다. 고물상 중 10∼20%에 해당하는 기업형 고물상을 대상으로 한 것이지만 업주들은 “고물상이 도시 미관을 해치는 시설이라는 인식이 깔려 있는 것 같아 마음이 썩 좋지 않다”고 말한다.  

무엇보다 고물상을 힘들게 하는 것은 최근 유가 하락 추세와 맞물려 덩달아 폐자원 가격이 떨어진 점이다. 한국환경공단이 2013년과 올해 2월 시장에서 거래되는 폐자원 가격(kg당)을 비교했더니 △고철은 305원에서 96원 △압축페트병은 500원에서 281원 △철캔은 221원에서 80원 △폐신문지는 117원에서 97원 △폐플라스틱은 775원에서 658원으로 각각 크게 떨어진 것으로 나타났다. 재활용품 가격은 신제품 가격이 떨어지면 함께 떨어질 수밖에 없는데, 유가 하락으로 제품 가격이 전반적으로 하락했고 국내 경기도 덩달아 침체돼 시장거래가 활발하지 않아 가격이 계속 떨어지는 구조다. 이 때문에 자연스럽게 폐지를 주워 파는 노인 등 도시 빈민의 수입과 고물상의 수입도 덩달아 줄어들었다.

이날 고 씨는 폐지 박스를 5t 차량에 실어 중간거래자에게 보냈다. 한 차를 보내고 폐지 값으로 받는 돈은 25만 원 정도. 약 23만 원을 들여 폐지를 매입했던 만큼 약 2만 원의 이익을 남겼다. 매년 이익이 줄어들다 보니 부지 임대료를 내고 나면 남는 게 없는 수준이다. 폐품 가격이 하락하면서 고물상도 경영의 어려움을 겪고 폐업하는 고물상도 늘어나는 추세다. 일부 지역에서는 경쟁자를 밀어내기 위해 고물상들이 제 살 깎기 경쟁을 하는 곳도 많다. 그러다 보니 고물상들은 해마다 경영이 어려워진다고 하소연한다.

고물상이 적자를 보는 수준이다 보니 폐품을 팔아 생계를 유지하는 노인의 경우 폐지 100kg을 모아 고물상에 팔아도 4600원 정도밖에 벌지 못한다. 서울 도봉구에서 폐지를 줍는 노인 김인용 씨(81)는 “계속 폐지 값이 떨어져 아무리 부지런해도 4000원을 벌기 쉽지 않은데 라면 값이라도 벌기 위해 계속 일하고 있다”고 말했다.

가파른 폐자원 가격 하락세 때문에 폐품 수거 노인의 수입이 줄어드는 것을 보면 고물상 업주들도 가슴이 아프다고 말한다. 서울 성동구에서 고물상을 운영하는 류모 씨는 “폐품 수거 노인이 180명 정도 오가는데 96세 할머니도 있다”며 “여기에 1t 차량을 끌고 다니는 고물 수집업자가 아니면 이익을 남기지 못하는 구조여서 노인들이 점차 폐지 수집을 포기하고 있다”고 말했다.  

고물상을 비롯한 영세 재활용 업체들에 대한 규제를 상당 부분 줄여주는 내용의 자원순환기본법이 최근 국회를 통과하면서 고물상이 불필요한 규제 비용을 줄이고 이에 따라 재활용에 따른 이익도 커질 것으로 환경부는 보고 있다. 이를 통해 고물상의 숨통이 다소 트이면서 이에 의지하는 폐품 수집인들에게도 이익이 돌아갈 것으로 정부는 기대하고 있다.

자원순환기본법은 폐지처럼 환경문제가 불거질 가능성이 낮고 자원 순환이 가능한 품목에 한해 폐기물에서 제외하고, 시장에서 비교적 자유롭게 거래하도록 규제를 풀어주는 내용이 포함돼 있다. 그동안 폐기물 규제 때문에 스티로폼을 운송하려고 해도 지정된 폐기물 운송차량만 이용해야 했고 이 때문에 비용이 커졌다. 지금까진 이 같은 규제 때문에 폐자원 매입 가격이 떨어지면 재활용하는 것보다 매립하는 추세도 나타났다.

환경부는 폐기물과 관련한 규제를 풀어 순환자원을 폭넓게 인정하면 고물상이 특정 폐기물용 화물차를 고집할 필요도 없고 이에 따라 점차 순이익이 늘어날 것으로 보고 있다. 환경부 관계자는 “고물상을 비롯해 재활용 산업이 어엿한 사업으로 성장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한 것”이라며 도시 빈민과 영세 사업자를 지원하는 사업을 늘려갈 계획이라고 말했다. 자원 순환 기지로서 고물상의 역할과 위치를 인정하는 방향으로 정책을 펴겠다는 입장도 밝혔다. 고물상의 자원순환센터 전환이 새로운 과제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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